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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의병장 보도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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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예총 작성일10-08-18 13:07 조회6,7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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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참고 자료>


‘국치 100년 전북시민대회’(대회장 이석영)의 일환으로 한말 호남의병장 전해산(全海山)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얼을 추모하고 아울러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경술년을 전후하여 순국했거나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던 주요 의병장과 의병 400여 분의 명복을 기리는 행사가 8월 23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추모식을 비롯하여 강연회, 사진자료 전시회 등이 전북 전주시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지난해‘남한의병 대토벌’100주년을 맞아 KBS 방송 전주총국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도민 500여 명이 이석용(李錫庸) 의병장과 의진의 주요 참모 28분의 영령을 모신 임실 소충사(昭忠祠), 장수의 전해산 의병장 묘, 무주 출신 신명선(申明善) 의병장과 의병들이 함께 묻혀 있는 칠연의총(七淵義?) 등지를 순례한데 이어 올해는 그때 피체되어 이듬해인 경술년에 순국한 의병장들의 순국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 전해산(全海山) 의병장의 모습

왼쪽 한시는 전 의병장이 옥중에서 쓴 것이다.

  이날 행사는 전북지역 주요 사회단체가 합동으로‘한말 호남의병장 추모위원회’(위원장 이석영)를 구성하고, 전북도청과 전북교육청, 전주시청, 장수군청, 의병정신선양회, 광복회 전북지부, 전주보훈지청 등이 후원하여 이루어진 대규모 행사였다.

  추모행사는 전해산 의병장의 행적 소개, 전(傳) 낭독, 유시(遺詩)‘옥중음(獄中吟)’낭송에 이어 손자 부부의『호남의병장 전해산』(상?하) 책을 영전에 헌정하고, 추모위원장의 인사와 정세균 국회의원, 김승환 전북교육감, 전북도지사를 대리한 이경옥 행정부지사의 추모사와 전해산 의병장 손자의 감사의 말과 헌화를 끝으로 1부 행사를 마치고, 2부 행사는 호남 의병투쟁에 관한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강연으로 이어졌다.


  전해산 의병장은 본명이 기홍(基泓)이고, 전북 임실 출신으로 나주, 영광 등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자는 수용(垂鏞)이고, 해산(海山)은 의병투쟁을 전개할 때 산과 바다를 누비며 활동하겠다는 의미로 자호(自號)한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유생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문에 소질을 보이자, 그의 부친은 오직 학문 연마에 기대를 걸었다. 약 15년 동안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인근에 수재로 소문날 정도였다. 그가 특히 탐독했던 책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었다. 또한 그가 점복(卜筮)에 능하여 신통한 예견력을 지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역에도 밝았던 것 같다.

  전해산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동시에 그는 의병부대의 명칭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이라 했는데, 이 의진(義陣)의 큰 특징으로는 전 친위대 참위 출신 정원집과 같은 해산군인과 포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구한국 군대의 전통적인 편제를 갖추고 일원적인 지휘계통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반 병사를 지휘하는 십장(什長), 십장 위에는 도십장(都什長)-도포(都砲)-선봉(先鋒)-의병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갖춘 것이었다.

  전해산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과 함께 호남의병의 연합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겨울 이들은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탄생시켰다. 그는 호남동의단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당시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모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이 연합조직을 결성한 것은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활동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일제는 전해산이 이끄는 대동창의단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거나, 한국인 밀정과 일본 수비대, 경찰을 주축으로 하는 변장정찰대를 구성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 1909년에 들어와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전해산 의병부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특히 1909년 4월 이들은 영광 오동 및 덕흥 전투에서 잇따라 패한 후 재기가 불가능한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기에 결국 전해산 의병장은 의병을 해산하고 후일을 꾀하고자 했으나, 마침내 12월 17일 피체되어 이듬해 8월 23일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전해산 의병장은 1908년 여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부터는 호남의 주요 의병부대 11개를 연합한 의병부대의 대장이었다고 했다.


  이어 전해산 의병장의 삶을 정리한 책『호남의병장 전해산』(상?하)을 엮은 이태룡 박사의 책 소개가 이어졌다. 책의 상권에는 전해산 의병장이 의병투쟁을 벌일 때 손수 쓴『진중일기』(『전해산진중일기』로 통칭)와『한국독립운동사』자료(일본 경찰이 기록한『폭도에 관한 편책』번역본) 속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하권은 광복 후 친족과 장수향교에서 펴낸『해산창의록』을 번역하고, 전해산 의병장에 관한 논문이나 기사들을 묶은 것이라고 소개한 후 전해산 선생이 의병장에 추대된 경위와 의병투쟁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전해산 선생은 1907년 가을부터 이석용 의병장과 더불어 전북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이듬해 2월 일본 군경의 공격을 받은 후 이석용 의병장은 전북에서, 자신은 전남지역으로 가서 의병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한 후 남으로 향했다. 그러나 전남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의병투쟁을 벌였던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하고, 조경환?오성술 의병장이 의진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해산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있을 때 고종의 밀조(密詔)를 허리띠에 숨기고 유배지 지도(智島)를 탈출한 전 친위대 참위 정원집이 해산군인들과 함께 찾아와서 그 밀조를 바치면서 의병부대를 이끌어 달라는 바람에 새로운 의진을 구성하고 의병장에 올랐던 것을 소개했고, 이어 한말의병에 관하여 강연했다.


  100년 전 한말의병은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목숨을 내던지고 왜적(倭賊)과 싸워야 했다. 과거 임진왜란이나 몽골군을 상대로 싸웠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옛날에는 무기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에 의병투쟁은 군인과 민간인의 싸움 정도에 비할 수 있겠으나 한말의병은 창이나 칼, 화승총을 들고 6연발총, 기관총을 휴대하고 기마병까지 동원된 왜적을 상대로 승부를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화승총 들고 싸워봐야 왜적의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의병에 참여하면 가족의 삶도 보장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왜적을 치러 나가면 목숨을 잃게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떨쳐 일어섰던 이가 한말의병이었다고 했다.


  그는“왜적들의 주요 의병 살육전을 보면,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왜경(倭警)이 간여한 살육전 횟수 1,976회, 의병수 82,767명, 순국자 5,721명, 포로 1,081명, 불탄 집이 1,991채였고, 의병 살육을 위한 왜군(倭軍)은 북부수비관구에 보병 6개 연대, 기병 1개 연대, 야포병 1개 연대, 공병 1개 대대를, 남부수비관구에 보병 3개 연대, 기병 1개 대대를 동원했으니,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때보다 오히려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의병 살육전을 전개했다.”고 주장했다.


  왜적은 호남의병 살육을 위해서 1908년 2월 기구지(菊地) 대좌를 대장으로 대규모 살육부대를 편성하고 3월까지 의병 대살육에 나섰던 것. 이 기간 동안 150여 회에 걸친 살육전을 통하여 의병이 입은 피해는 사망 756명, 부상 수백 명, 포로 7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이른바‘남한 의병 대토벌’을 위해 일본군 2개 연대를 동원했는데, 1개 연대는 경남 서부지역에서, 1개 연대는 전북지역에서 각각 전남 방면으로 의병 살육에 나섰으니, 9월 1일부터 시작된 대살육전이 두 달 동안 전개되어 420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천687명을 체포되었다고 했다.


  이석영 위원장은『호남의병장 전해산』(상?하) 책‘추천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100년 전에 이미 나라를 잃으면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한 선각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의병이었습니다. 한말 의병은 을미왜란을 기점으로‘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하는 의병이 일어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으니, 한말 의병사는 15년이나 되는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해산 의병장은 호남지역 주요 의진 11개의 연합의진‘호남동의단’을 이끌었던 의병대장이었습니다. 그의 의병투쟁 기록은『전해산진중일기』에 나타나 있고, 일본 비밀기록에 100여 차례나 나오는 분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호남의병장 전해산』(상?하)

  이석영 위원장은 지난해에는 반민특위가 허망하게 무너진 지 60년 만에『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고, 전해산 의병장에 대한 기록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태룡 박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정리되어 당시 전해산 의병장을 비롯한 호남의병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기쁜 일들이라고 말한 후,

“국치 100년을 맞기까지 아직도 정리를 하지 못한 우리 의병들의 공적을 하루빨리 찾아 민족의 이름으로 기려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못나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일제의 지배가 도움이 됐으며, 오히려 정당했다는 논리는 결국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했던 매국노와 부왜인(附倭人)들의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일제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여 민족정기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전해산 손자 전영복 씨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부친은 일제의 횡포로 인해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겨우 10살이 지나면서부터 꼴머슴으로 성장한 탓에‘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던’아버지가 어느 날 들려준 얘기,“네 조부께서는 일본헌병대에 붙잡혀서 오랏줄에 묶인 채 20리 떨어진 곳에 사시던 증조부모님께 새벽같이 하직인사를 올리고 헌병대로 끌려가셨고, 증조모님께서는 그 충격으로 쓰러져서 다음날 돌아가셨는데, 증조부님께서도 채 석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단다.”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할아버지 전해산 의병장이 일본군경과 싸우면서 친히 기록했다는『전해산진중일기』만해도 많은 역경을 거쳐 보관해 오면서 날짜 등이 뒤엉켜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제의 비밀기록인 이른바『폭도에 관한 편책』을 국한문으로 번역한『한국독립운동사』8~19권도 글씨가 깨알같이 작고 그 분량이 8천 쪽이 넘는 방대한 것이어서, 그 속에 흩어져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을 찾아 정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니, 그 고마움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는 이 책을 할아버지 영전에 바치면서 이 책이 국권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이름조차 없이 스러져간 의병들의 숭고한 삶과 얼을 기리고 계승하는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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